아침저녁은 쌀쌀한 기운으로 가득하지만, 한낮에 내리쬐는 가을 햇살은 엄마의 포근한 가슴처럼 너무나 따사롭다. 엄마와 함께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 단풍구경을 나섰다. “단풍이 어쩜 저렇게 예쁘게 물들었을까” 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단풍을 가리키며 눈으로 볼 것을 주문한다. 그러면 울 엄마는 아이 같은 순박함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말 예쁘다”며 맞장구를 쳐준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은 동전의 앞면, 뒷면처럼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아 우울하다. 봄에는 벚꽃이 피는 설렘, 희망을 이야기하다가도 어느새 내년에도 울 엄마가 저 벚꽃잔치를 볼 수 있을까? 아니야 꼭 봐야만 해 하고 가슴 한견은 간절함으로 가득 찬다.
여자의 일생은 너무 아련하고 고달프다
1. 엄마의 인생은 이미자 가수 노래 가사였다
오늘 곱게 물든 예쁜 단풍을 보면서도 조금 더 지나면 고운 자태 단풍잎도 낙엽이 되어 바람에 이리저리 떠도는 영혼처럼 길거리를 헤매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 누군가 떠나고 이별하는 이 계절이 슬슬 무서워진다. 낙엽이 떨어지듯 황량 감이 몰려오는 이유는 95세가 되신 울 엄마에 대한 애증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울 엄마의 삶은 이미자 가수의 명곡 “여자의 일생 ” 노래 가사처럼 고달픈 인생길, 험난하고 비탈진 인생길을 걸어오셨다. 어릴 적 울엄마의 집은 문구점과 과자공장을 운영하여 남 부럽지 않은 가정형편이었다. 1남 4녀인 딸들은 교육을 받아 본인들의 의지대로 울 엄마는 간호사, 이모들은 초등학교 교사 , 양장 학원장 , 전화국 교환원등 직장생활을 하였고 각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렸다. 제과조합장 이셨던 할아버지가 원료를 구입하여 기차로 내려오는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으나 잘 극복하였고 대전, 대구병원등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신 엄마는 중매결혼을 하셨는데...
2. 결혼과 동시에 고난의 길은 시작되었다.
인생의 고난길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곱게 자란 엄마가 농촌 시집살이를 하니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중절모에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오즉 했으면 엄마의 생활을 보시곤 보따리를 싸가지고 올 것을 수차례 권유했지만 차마 어린아이들이 눈에 밟혀 떠나지 못했음을 회상하며 그것 또한 본인이 짊어져야 할 운명이라 생각하셨다고 한다. 우리집은 기찻길 옆 1남 6녀 딸 부잣집으로 나는 5섯째이다 그 어렵던 시절에 대가족을 건사하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보통일이 아니었을 터인데 그런 연유 인지 모르지만 유년시절 나에게 울 엄마의 존재는 크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3. 엄마는 대가족을 건사하는 여장부
걷기 전에는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야채를 팔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주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하셨으니 나를 돌봐줄 기회가 거의 전무하였고, 그나마 초등학교 때는 학교 육성회장을 하셨으니 간간히 교실에서 잠시라도 엄마의 얼굴을 보곤 하였다. 우리 집 수입원은 채소를 가꾸고 벼를 재배하는 살림이라 허구한 날 들판에서 머물렀으니 우리와 함께 할 여유는 생각도 못하였고, 그 이후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도 엄마와의 따뜻한 추억이 별로 없고 그림자만 있었던 것 같다. 언니들이 많았기에 부모처럼 대신 보살펴 주었기에 아무 탈없이 성장기를 보냈다. 이처럼 많은 식구들이 있는 게 도움도 되었지만 그만큼 부담도 무척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엄마의 일생은 늘 고달픔의 연속이었다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4. 갑작스럽게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또한 외아들 하나에 많은 것을 담보한 세월이었기에, 그에 돌아온 엄마의 상심은 두배로 엄마를 괴롭게 하였고 지금도 가슴에 응어리 진체 남아있을 것은 자명하다. 그 오매불망하던 오빠는 엄마의 많은 관심을 접어두고 50세도 안된 젊은 청춘에 5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날한시에 돌아오지 못할 아주 먼 황망 길을 떠났다. 엄마의 분신 같던 외아들이라 울 엄마의 상흔은 아마도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함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모질고 억척같이 살아온 세월 속에 남겨진 것은 아마도 울 엄마의 가슴속에 응집된 한의 덩어리가 아닐까 집작 한다. 죽고 싶다고 죽을 수도 없는 운명이라면, 남은 세월을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부담 주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자꾸만 생각이 든다.
5. 세상과 소통하는 우리 엄마
울 엄마가 삶을 유지하는 것은 고집스러움과 원리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기 관리와 시간 관리인 듯하다. 암마의 간호사 생활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큰 원동력이 된 것은 확실하다. 병원이 귀하던 시절에 우리 집은 늘 아이를 업고 찾아오는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북적대곤 하였으니, 그 덕분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눔 하는 삶을 사셨으니 그런 세상 구경도 위안이 되었으며, 또한 자식들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고 믿고 싶다. 난 이렇게 어떤 면에서는 울 엄마의 고집과 사고방식이 존경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고, 배웠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변화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을 텐데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본 적도 있다. 어찌하여튼 내가 바라보는 울 엄마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장부 그리고 남을 위해서도 헌신할 줄 아는 가슴이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자라고 말한다.
6. 우리 엄마의 건강생활
그런데 울 엄마에게도 금년 하반기부터는 기억이 희미해지고 기력도 쇠약해져 가슴이 저려온다. 텔레비전에서 누군가 기억을 훔쳐가는 병 그것이 바로 치매라고 보험 광고를 하던데 말이다. 세월 앞에 당할자가 없으니 울 엄마에게도 그런 날이 오겠지만, 아무튼 예쁜 치매로 우리 엄마에게 선물처럼 왔으면 좋겠다. 그동안 80년 가까운 세월! 그 멀고도 험한 아득한 세월! 여자이기에 참아야 했던 아픔과 설움, 외로움 등을 느끼지 못하는 예쁜 치매로 말이다. 울 엄마에게서 아들사랑에 절규했던 가슴앓이 언저리를 깔끔하게 도려내어 가지고 가면 더더욱 좋겠는데.. 이렇듯 울엄마 인생 굽이 굽이 묻어있는 안 좋은 기억들만 몽땅 주고 싶어 간절하게, 애절하게 기도한다. 내가 30년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자 결심한 중에는 연로하신 엄마와의 시간을 갖기 위한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엄마를 보살펴 줄 누군가도 필요했지만 젊은 날 에는 많은 것을 배우려는 열망과 직장생활을 한다는 이유를 달아 엄마와의 추억이 많지 않기에 서둘러 사직을 결심했다. 그리고 어느덧 2년이 되어가고 있는 즈음. 여행도 하고 , 엄마가 그리워하는 30년 지기 친구도 찾아보고 등등 나의 계획 속에서 접혀있는 부분처럼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작성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생활하고 있다. 울 엄마는 꽃을 아주 잘 키우는 재주가 있다. 내 생일날 들어온 호접난 화분을 엄마에게 드렸더니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키우셨는지 그다음 해 내 생일날까지 1년 365일 동안 꽃을 볼 수 있었으니 참 신기하기도 했으며 그때부터 울 엄마손은 마술을 부리는 금손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세상에서 꽃을 제일 이쁘게 키우는 울 엄마! 울 아버지에게도 나는 사랑받는 딸이었지만 울 엄마에게도 조금은 나의 도리를 다하는 괜찮은 딸이고 싶다 그리고 신께서 나에게 다시 태어나는 기회를 준다면, 난 다시 부잣집도 아니요! 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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