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가로수길을 달려 나는 지금 [덕혜옹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권비영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 직장을 다닐 때는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다양하게 맛보고 있는 지금! 호사를 누린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바쁘기도 하지만 계절에 걸맞은 감성을 느낄 기회가 있어 행복하다. 잠자고. 있는 나의 세포들을 깨운다. 이 맘 때가 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예산 마무리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언제나 10월이 두 달이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지내온 직장생활이었다. 정말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하더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 권비영 작가! 우리에게는 [하란사]로 덕혜옹주의 삶을 재조명하여 문학계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소설가를 만나다
인상적인 그녀 권비영 작가
조금 행사장에 일찍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키는 생각보다 아주 작았는데 목발을 짚고 계셨기에. 내가. 처음 마주한 인상은 작지만 단단한 느낌의 강인한 여자 그 자체였다. 바로 조선의 어머니 상이다. 푸근하고 지고지순한 느낌이 아니라 어떠한 어려움도 헤치고 올라오는 새싹처럼 강인함으로 똘똘 뭉친 느낌의 소유자! 지도교수의 소개로 작가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 오신 소감을 물어보자 오늘의 만남을 너무 기뻐하셨다.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작은 거인, 여장부이시다. 근대사의 아이콘이며 시대의 아픔을 아는 전형적인 인물에 많은 탐구를 하신 덕분인지 권비영 작가는 대단한 열정이 가득한 지난날을 보내신 듯 실타래를 풀었다. 덕혜옹주의 본명이 [하란사]가 아니고 [김란사]라는 가짜 같은 진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남편 성을 따서 그렇게 되었단다. 본인 이름 역시 권비영이지만 흔히 권미영이라는 둥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 드물다고.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며 학교 다닐 때의 한문 선생님과의 해프닝도 이야기한다. 권 작가님은 70~80세 어르신들의 백일장 심사와 비행청소년 심사위원으로 갈 때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고 감동을 받는다고 하셨다. 또한. 그 들에게 본인의 유명세만큼 받았던 영향력으로 격려, 위안을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며, 좋은 글쓰기는 문장도 작법도 아닌 진실함, 간절함, 절절함이 묻어나는 진심이라고 하셨다. 간절함이 내 안에 있어야 꿈을 이룬다고, 본인 역시 글쓰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공모에 떨어지기를 여러 번, 포기도 수없이 했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휑하니 문학에 대한 열망이 남았기에 또 시작을 하는 듯,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오늘날의 권비영이 되었다고 겸손을 떠신다. 덕혜옹주를 쓰기 위해서는 일본, 대마도 등 덕혜옹주의 흔적을 따라 여러 곳을 다니기도 하셨다고 하시며, 덕혜옹주의 묘역을 찾았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신다. 꽃바구니를 들고 참배를 갔는데 며칠 후에 꿈속에 나타나 길몽이라는 것을 직감하기도 했다고 하시며, 덕혜옹주가 날개 달린 듯 인기가 있을 때는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단다.
출판계에서는 유령작가가 나타난 듯 이해가 안 된다며 난리법석도 있었단다. 권비영 작가는 스스로 연때가 맞아떨어진 것이라며 지난날을 교훈 삼아 나를 표현하고 인정받고자 노력하였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끝까지 해보길 권유하셨다. 인생 그렇게 길지 않으니 끈을 놓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매진하라고 당부하셨다. 조선독립운동가 덕혜옹주를 담은 것은 대한제국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본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강했다고 하시며 모든 것은 첫술에 배부를 수 있느냐며 큰 격려를 주셨다. 그리고 한분 한분에게 좋은 글을 남겨주시는 싸인 엽서를 건네주셨다. 책을 출판하는 그날이 오면 축하파티를 함께 하자고 하니 흔쾌히 수락을 하셨다. 그날 뵙기를 학수고대하며. 우리는 기념촬영으로 마무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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