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이후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걸어온 지난날의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나의 경우도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추억들을 자주 끌어내어 펼쳐본다. 예전에는 별것 아니라고 넘긴 상황들에 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올라와 기쁨과 슬픔을 소환하기도 하고 오만가지 생각을 덧붙이는 장면을 만들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느낄 수 있는 멋진 풍광과 다양한 겨울놀이 그리고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고 할 수 있는 군고구마와 동치미, 군밤, 붕어빵, 어묵, 팥죽, 호빵등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 준다. 나는 이 맛있는 겨울 먹거리 매력에 푹 빠져서 추운 겨울을 좋아하는지 아무튼 난 추운 겨울이 되면 다른 계절보다 행복하다는 나만의 느낌이 있어 더욱 좋다. 특히 붕어빵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신선함과 훈훈함을 안겨주었고, 정도의 길로 안내한 길라잡이였기에 나는 붕어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있어 붕어빵의 존재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다
붕어빵은 내 인생에 무한한 가치와 행복을 안겨주는 아이콘
1. 붕어빵 나눔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다.
코로나 여파로 모두가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붕어빵 장수가 많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와 붕어빵 어플까지 생겼다는 방송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게 겨울 간식거리로 자리매김한 것이 붕어빵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입맛에도 안성맞춤 같은 서민음식 붕어빵이지만 경제적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붕어빵을 굽는 수요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소식은 소중했던 추억 한 장면이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련함이 있었다. 겉은 노릇노릇 바삭하게 구워지고 속은 뜨거운 팥앙금이 혀 끝을 익게 할 만큼 뜨끈 뜨근한 붕어빵을 먹노라면 손은 물론 입속으로 이어지는 가슴속 까지 따뜻한 온기가 몸속으로 퍼진다. 코로나가 오기 전 큰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다. 각지에서 함께하는 천여 명이 넘는 행사였기에 나름 나의 역량을 평가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어떻게 맞이할까 하면서 이벤트성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찾으려 노력하였고 그중에 많은 참석자로부터 " 붕어빵을 구워준 천사자원봉사자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작은 붕어빵이지만 함께하신 분들의 연령대가 50세 이상이니 모두들 풍부하지 않게 생활하던 때라 붕어빵이 가져온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그날따라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 쌀쌀한 상태였기에 붕어빵을 굽는 봉고 트럭 앞에는 끈 없는 진풍경의 줄이 늘어섰다 그리고 모두들! 붕어빵 맛에 감탄하며 마음까지 훈훈하게 해 준 배려에 감사한다는 인사를 많이 해주셨으니 나 역시 기분이 흐뭇했다. 지금생각해도 추울 때 따뜻한 커피 한잔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듯이 그날의 붕어빵 드림행사는 신의 한 수였다. 입으로는 먹는 즐거움이 가득했고 마음은 따뜻함이 묻어나고 지난날의 추억이 되살아 나는 붕어빵이었기에 그들은 잔잔한 감동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 역시 공식적인 행사부문도 중요했지만 전체적으로 화합하고 비전을 담는 행사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로 나의 역할에 충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후 나는 장애인 관련 행사장에도 지원할 수 있는 부분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붕어빵이 없는 장애인 관련행사는 이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단골이벤트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지인이 이야기한다.
2. 재능 나눔으로 희망을 선물하다.
나의 직업이 자원봉사분야 업무지원이다 보니 나는 우리나라에 뜻하지 않은 재난재해가 일어나면 현장지원을 되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20년 동안 수많은 피해지역을 찾아 사랑 나눔을 실천했다. 태안 기름유출사고 시에는 5일째 되던 날 자원봉사자들과 바가지로 기름을 퍼냈고, 익산, 강릉 폭설 시에는 하우스 철거작업 지원을 위해 전기 관련 기술자위주의 자원봉사단을 꾸려 현장을 찾았고, 영동, 괴산 울진 수해복구 현장에도 수마가 지나간 자리를 함께 복구하려고 사랑의 밥차를 지원하여 도시락을 제공하였다, 세월호 사건 때는 진안군청의 요청으로 택배물건을 정리하는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고성산불이 났을 때에도 3일 정도 피해주민들을 위한 식사 대접으로 그들을 위로해 드렸다. 차후 이런 소식을 알고 함께 하고 싶다는 동행 봉사자가 나타났다. 붕어빵을 굽는 여사장이 합류하여 우리의 지원은 더 풍성해졌다. 의, 식, 주를 해결하는 외에도 필요한 지원이 간식 및 정서적 지원이었다. 이렇듯 현장마다 상황이 다르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 나눔 봉사자들이 함께하여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붕어빵 여사장님은 지금도 서울역, 청량리역등을 찾아 노숙자를 위한 재능 나눔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3. 붕어빵으로 아버지와 소통하다.
붕어빵은 나에게 행복이란 단어를 가르쳐 준 매개체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시내에 갔다 오시는 손에는 항상 갈색봉투가 들려 있었고 그 속에는 붕어빵이 들어 있었다. 동생과 나는 서로 한 마리라도 더 먹겠다며 싸우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겨울만 되면 나는 붕어빵이 그리웠고 어느 정도 성장하고는 아버지에게 내가 가끔 붕어빵을 사다 드리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는 붕어빵을 먹고 싶다고 하셨다. 때가 벚꽃이 흩날리는 4월경이라 나는 붕어빵을 굽는 사람이 없었기에 마트에서 팔고 있는 미니 붕어빵을 사다 드린 적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겨울에 붕어빵 장수를 만나면 아버지에게 붕어빵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수많은 음식 중에 문어, 붕어빵, 옹심이 칼국수가 먹고 싶었을까? 하고 아버지 생각을 더듬어본다. 나처럼 아버지에게도 분명 붕어빵은 추억 속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의 의미가 강인하게 박혀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겨울이면 빛을 발하는 간식 붕어빵!
오늘도 농협 앞에서 , 은행 앞에서, 신호등 앞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붕어빵을 파는 위치는 공교롭게도 은행 근처이다. 은행을 갖다 나오는 길에 만나는 붕어빵은 전략상 더 잘 팔리는 이유가 있을까? 지갑을 열어 보려는 마음일까? 가끔은 붕어빵을 파시는 분들은 사업등록증은 있을까? 없어도 되는것인가? 수입에 대한 세금은 어찌되는지? 추억의 간식이긴 하지만 위생적인 면은 괜찮을까? 등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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